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영성)/통일 과정 (문단 편집) == [[초(춘추전국시대)|초(楚)나라]] 멸망(기원전 223년) == 진왕 정 21년, 기원전 226년 진왕 정은 신정에서 일어난 한나라 구귀족들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영진(郢陳)에 있었던 [[한왕 안]]을 사사했다. 예상치 못하게 한나라의 구도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진왕 정으로 하여금 점령지의 군민들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했다. 비록 당장은 진나라의 세력이 강해 점령지의 군민들을 힘으로 누르고 있어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하지만, 만일 진나라의 형세에 균열이 일어난다면, 지하의 역도들은 반란을 일으킬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왕은 초나라의 공자 [[창평군]][*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초회왕|초 회왕]]의 이복동생이다.]을 초나라의 옛 도읍지였던 영진(郢陳)으로 보내어 초나라 군민들을 위무하게 했다.[* 혹은 신정의 난 이전에 갔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초나라 정벌에 반대하여 좌천되었다고도 한다.] 연나라를 멸한 후 진군은 초나라를 겨냥하였는데, 초나라는 비록 회왕 이후 쇠락해져있어도 여전히 남방의 대국이라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다. >진나라 장수 [[이신(전국시대)|이신]](李信)은 젊고 용감해 일찍이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연나라 태자 연단(燕丹)을 연수(衍水)까지 뒤쫓아 적군을 무찌르고 연단을 사로잡은 적이 있었는데, 진왕 정은 그를 현명하고 용감하다고 여겼다. "내가 초나라를 공격해 빼앗으려고 하는데, 장군이 생각하기에 병사가 어느 정도면 되겠소?" 이신이 답했다. "20만이면 충분합니다." 진왕 정은 거듭하여 왕전에게 물었다. 왕전이 답했다. "반드시 60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진왕 정은 말했다. "왕 장군도 늙었구려, 무엇을 그리 겁을 내시오! 이 장군이 과연 기세가 용맹하다더니, 그 말이 옳소." 드디어 이신과 [[몽염]](蒙恬)을 장수로 삼아 병사 20만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왕전은 자신의 말이 쓰이지 않자 병을 핑계대며 빈양 땅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냈다.[* 이것을 온전히 진왕 정의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왕전이 요구한 60만은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전 병력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 병력을 다 끌고 나갔던 왕전이 그대로 유턴해버리면 어찌할 것인가?...60만을 동원하면 여러장수가 이끌게 된다. 당연히 어느 누구도 왕전 한 사람에게 60만 모두를 이끌게 하지 않는다.] 진왕 정 22년, 기원전 225년 왕분이 이끄는 10만 진군이 위나라를 공격하는 동안, 진왕 정은 초나라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 용맹함과 과단성을 증명한 바 있는 이신을 대장에 임명하고 몽염을 부장으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초나라를 대대적으로 공략하게 했다. 진군은 초군이 유리할 늪지와 물을 피해 기병이 활동하기 편한 평원 지형을 주공으로 하여 공격로를 잡았다. 이신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자신은 평여(平舆)를 공격하고, 부장 몽염은 침구(寝丘)를 공격하게 해 함락시켜 초군을 대파했다. 이신은 재차 언영(鄢郢)을 깨뜨리고 성부(城父)[* 지금의 안후이성 박주(亳州) 동남]에서 몽염과 회합하기로 했다. 이신과 몽염이 지휘하는 진군은 영진과 동남부에서 초군을 대파했다. 초나라 정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이신은 원정군을 합세하여 초나라의 수도인 수춘으로 남하해 일거에 초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이었다. 초나라는 [[초회왕|회왕]] 이후 몇 대에 걸쳐 용렬한 군주의 지배하에 있어와 국력은 취약해졌고, 국내에는 쓸 만한 장수가 [[항연]] 뿐이었다. 초군은 진군에 연이어 패배하였고, 다급해진 초나라 조정은 계속해서 진나라에 땅을 떼어줄 것을 약속하며 강화할 것을 요청했다. 전황은 초나라가 불리해 진나라의 초전 기세를 막지 못했지만, 초나라의 최정예 군단은 보존된 상태였다. 항연군이 인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창평군이 거병하여 영진 일대를 장악하고 이신의 퇴로와 보급을 끊었다. 진군이 점령한 많은 지역에서 반란 모의가 존재했다. 초나라의 옛 수도인 영진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진왕 정은 초나라를 정벌하기에 앞서, 초나라의 공자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진 창평군이 초나라의 군민들을 위무하여 영진의 시국을 안정시키길 원했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이 가시화되면서 초나라 정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진나라의 재상을 지냈으나 초나라의 왕족이기도 했던 창평군은 조국 초나라의 멸망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창평군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경위와 경과는 사서에 기록되지 않거나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 현재 중국에서도 연구 중에 있다. 본 문서는 창평군에 관한 여러 정보를 취합한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니다. ] 창평군은 초나라의 공자라는 신분을 활용하여 반진세력을 결집한 후 진군의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킨\켰다. 본래 초나라의 땅이었던 영진 일대의 초나라 인민들과 가까운 한나라 인민들도 그에 호응하여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영진을 장악하며 진군의 후방 보급을 차단하고 진군의 퇴각로를 막아 이신 군에 대한 포위 섬멸을 도모하게 되었다. 초나라 정벌을 진행하던 이신 군은 예상치 못한 창평군의 반란으로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했다. 일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성부에서 물러나 일단 후방의 위협이 되는 창평군을 진압하기로 했고, 퇴각하여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20만명의 진군은 초나라를 정벌하기에 부족한 숫자였다. 진군에 균열이 생기자 곧바로 초나라가 반격할 여지를 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20만 대군을 이끈 초나라의 총사령관 항연은 성부에서 남하할 이신군을 대비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진군이 사라졌고, 이에 항연은 진군에 모종의 균열이 일어난 것을 짐작하여 진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항연은 진군을 3일 밤낮 동안 추격한 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퇴각했던 진군을 후방에서 기습했다. 이신은 이에 침착하게 지휘하여 초군을 막아냈으나 진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적국의 포위망은 완성되어 본군은 전멸을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얼마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빠르게 퇴각하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항연은 계속되는 추격전 끝에 진군을 무찔러 일곱 명의 도위와 무수한 군사를 죽였다. 이신은 패잔병을 이끌고 퇴각했다. 항연은 조나라 국경까지 추격해왔으나 보루에 막혀 할 수 없이 선회해 남군을 공략했다. 항연은 초나라의 옛 실지를 되찾고 계속해 서진하여 한나라의 경내로 들어섰다.[* 혹은 창평군이 공략했다고도 한다.] >진왕 정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스스로 빈양 땅으로 달려가서 왕전을 만나 사죄하며 말했다. >"과인이 장군의 계략을 쓰지 않아 이신이 과연 진나라 군대를 욕보였소. 지금 들으니 초나라 병사가 날마다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하니, 장군께서 비록 병중이라고 해도 과인을 버리지 말아 주시오!" >왕전이 사양하며 말했다. >"노신은 지치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니, 대왕께서는 부디 현명한 장수를 택해주십시오." >진왕 정이 사죄하며 말했다. >"그만둬주시오, 장군께서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왕전이 말했다 >"대왕께서 어쩔 수 없이 신을 쓰고자 하신다면, 60만 명의 병사가 아니면 안 됩니다." >진왕이 말했다. >"장군의 계략을 따르도록 하겠소." >이에 왕전이 장수가 되어 병사 60만 명을 이끄니, 진왕이 몸소 파수(灞水)까지 나와 왕전을 전송했다. 왕전이 가면서 훌륭한 논밭과 저택, 정원과 연못을 달라고 심할 정도로 거듭 요청했다. >진왕이 말했다. >"장군은 가면서 어찌 가난을 걱정하시오?" >왕전이 말했다. >"대왕의 장수가 되어 공을 이루었음에도 끝내 후에 봉해지지 못했으니, 대왕의 관심이 신에게 쏠려 있을 때를 이용하여 정원과 연못을 청해 자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서입니다." >진왕은 크게 웃었다. 왕전이 관에 이르러 5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좋은 논밭을 요청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장군께서 대가를 구걸하는 게 너무 지나치십니다." >왕전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네. 무릇 진왕은 교만하며 사람을 믿지 않는 성격일세. 그런데 지금 진나라가 텅 빌 정도로 나라의 병사를 모두 나에게 맡기고 있으니, 내가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논밭과 저택을 요청해 다른 뜻이 없음을 알리지 않으면 진왕께서는 가만히 앉아 생각하며 나를 의심하지 않겠는가?" 진왕 정은 초나라가 비록 쇠약해졌으나, 땅이 넓고 인구가 풍부해 여전히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어 쉽게 멸망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진왕 정은 친히 왕전의 집이 있는 빈양으로 가 그에게 60만 대군을 지휘해줄 것을 간청하여 왕전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로 출정하기로 했다. 노장군이 60만 대군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능히 군주의 신임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60만 명의 병사는 진나라의 모든 병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만약 왕전이 이번 전쟁에서 패배하여 초군이 북상한다면 삼진(한•위•조)의 귀족들이 호응하여 진군을 몰아낼 것이었다. 진왕 정 23년, 기원전 224년 왕전과 [[몽무]]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재차 공격하여 평여로 진출했다. 이에 초왕 [[웅부추|부추]]는 전국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항연에게 진군을 물리칠 것을 명령했다. 초나라의 대장 항연은 본래 이끌던 20만 명의 군사와 초왕 부추에게서 증원받은 20만 명을 합친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평여에서 진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왕전은 10여 리에 걸친 진을 펼치고 견벽거수(見辟擧守)하며 지킬 뿐 전투를 하지 않았다. 초나라 조정에서는 진군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왜 왕전은 나라를 통째로 끌고 나온 거나 다름없는 대군을 이끌고 왔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어쨌든 진군이 견고한 요새를 쌓고 굳게 지키자 항연도 일단 대치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후 초군이 진군을 도발하며 전투를 유도했을 때도 진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진군은 60만 명에 달하여 수는 초군을 능가하지만 잘 조련되지 않은 신병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왕전이 사람을 시켜 군사들을 보게한 다음 물었다. "군중에서 무엇을 하며 놀더냐?" "투석과 멀리뛰기를 하고 있습니다." 왕전이 말했다. "이제야 쓸 만하겠구나!" 왕전이 초나라 정벌에 대하여 진왕 정에게 간언한 것은 국가 전체의 역량으로 총력전을 펼쳐 초나라를 정벌하자는 것이었다. 진•초 양국 군대만의 대결이 아닌 양국 국력의 대결로 몰고 가서 국력이 강하고 [[상앙]] 변법으로 동원력마저 더 강한 진나라의 우위를 십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장평대전]]에서 조나라가 조급히 군사를 움직여 대패한 것은 대군이 여러 해를 대치함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피폐해져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여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군사가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삼진을 멸망시킨 진나라는 후방의 걱정 없이 대량의 물자를 지원하며 장기전을 벌였다. 왕전은 매일 양과 소를 잡아 병사들과 식사를 하고 훈련시켜 점차 병사들의 투지와 사기가 높아졌다. 진•초 양국의 병력이 총동원된 후 한 해를 넘기자 초나라는 농업 수확에 차질이 생겨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원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떨어져 있는 초나라는 영토와 인구가 많다고는 하나 정치적/군사적으로 낙후돼 있어, 군세를 진나라만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대치가 1년을 넘기자 항연은 초군에 동쪽으로 철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혹은 초왕 부추가 항연을 의심해 철군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도 한다.] 조용히 기회를 봐왔던 왕전은 즉시 출병해 암암리에 초군을 추격하여 용맹한 용사들을 선봉으로 앞세워 초군을 강타했다. 초군은 예기치 못한 공격에 다급히 응전했지만 예봉이 꺾인 초군은 사기 충천한 진군을 당해낼 수 없어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교활한 왕전은 항연이 이신을 무찌른 계책과 똑같은 것으로 항연을 무찌른 것이었다. 초군은 기(蕲)의 남쪽에서 대파되었고, 왕전은 이를 추격하여 연달아 초군을 격파해 결국 대장 항연마저 죽였다.[* 항연은 왕전과의 전투 때 죽었다고도 하고, [[창평군]]과 함께 저항하다 죽었다고도 한다.] 왕전은 수도 수춘을 공격하여 초왕 부추를 포로로 잡았다. 초왕이 사로잡힌 이후 창평군은 강남으로 패퇴하여 회남에서 초왕으로 옹립되었다.[* 창평군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옹립되었거나, 아예 왕을 칭한 적이 없거나, 사마천이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도 한다.] 오월을 점거하고 장강의 지세를 경계로 삼아 진나라에 저항했으나, 진왕 정 24년, 기원전 223년 왕전은 회남을 공격해 격파하여 창평군을 죽이고 끝내 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